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앞으로 5년치 전기요금 약 25조원을 미리 내달라고 제안하고 세부 조건을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리 받은 돈으로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망을 짓겠다는 구상인데, 빚 210조원에 눌린 한전이 꺼낸 이례적인 카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삼성 20조, SK 5조

3일 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최근 삼성전자에 약 20조원, SK하이닉스에 약 5조원의 전기요금 선납을 제안했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낸 전기요금이 각각 4조1000억원, 9000억원이라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치를 계산한 액수다. 한전 관계자도 양사에 제안한 사실과 조건을 조율 중이라는 점은 확인했다.

선납금에는 이자를 붙인다. 국고채 2년물(약 3.4%)보다 높고 한전채 2년물(약 3.7%)보다 낮은 수준이 거론되며, 현금 대신 반기마다 전기요금에서 깎아주는 방식이 검토되고 있다. 다만 한전은 참여 여부와 이자율, 선납 규모·기간 등 세부 사항은 확정된 바 없다는 입장이다.
하루 이자만 115억

한전이 이런 제안까지 하게 된 배경은 재무 사정이다. 6월 말 기준 총부채는 210조7000억원이고 하루 이자 비용만 115억원 수준이다. 상반기 이자 비용은 2조원을 넘었다. 사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5배까지 늘려준 정부 특례가 내년 말 끝나면 2028년부터 한도가 2배로 다시 줄어 사채로 돌려막기도 어려워진다.

반면 전력망에 들어갈 돈은 계속 불어난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상 송전망 투자 수요만 약 72조8000억원이고, 12차 계획이 나오면 100조원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이 한전의 전망이다. 용인·호남 클러스터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직접 쓸 전력망이라 두 회사에 먼저 돈을 대달라고 한 셈이다.
두 회사는 왜 고민할까

한전은 지난 7월 재정경제부와 양사를 만난 뒤 제안서를 보냈고, 7월 말 한전 사장이 삼성전자 DS부문 경영진과 만난 데 이어 8월 중순 실무진 협의까지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입장에서는 시중 예금보다 높은 이자를 받으면서 생산시설에 필요한 전력망을 제때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20조원을 한꺼번에 묶는 것은 반도체 설비 투자에 매년 수십조원을 쓰는 삼성전자로서도 가벼운 결정이 아니다. 전기요금 인상이나 한전 재무 상황 변동 시 선납금 처리 방식도 정리해야 한다. 특정 대기업의 자금으로 공기업 전력망을 짓는 구조가 적절한지를 둘러싼 논의도 남아 있어, 협의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