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한 달간 코스피를 28% 넘게 끌어내린 범인을 두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등 여러 후보가 거론됐다. 그런데 폭락이 멈춘 자리에서 드러난 진짜 방아쇠는 따로 있었다. 미국의 한 헤지펀드가 빚을 감당하지 못해 주식을 통째로 토해낸 사건이다.
파이낸셜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30일(현지시간) 켄 그리핀이 이끄는 운용자산 710억 달러 규모의 시타델이 헤지펀드 ‘시추에이셔널 어웨어니스’의 상장주식 포트폴리오 대부분을 인수했다고 보도했다. 규모는 약 160억 달러. 24시간 안에 성사된, 월가 역사에서 손꼽히는 긴급 거래였다.
‘AI 예언자’의 439% 신화, 며칠 만에 무너지다

이 펀드를 이끈 인물은 전 오픈AI 연구원 레오폴드 아셴브레너다. 2024년 발표한 에세이 ‘시추에이셔널 어웨어니스: 앞으로의 10년’으로 실리콘밸리의 주목을 받은 그는 같은 이름의 헤지펀드를 세워 2년 만에 운용자산 200억 달러를 넘겼다. 투자 경력이 길지 않았음에도 실리콘밸리 거물들과 기관 자금이 몰렸고, 월가에서는 그를 ‘AI 예언자’라 불렀다.
성적표도 화려했다. 그는 불과 지난주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올해 상반기 수익률이 439%에 달했다며 8월 1일부터 신규 자금을 받겠다고 안내했다. 그 며칠 뒤 펀드는 무너졌다.
하드웨어 사고 소프트웨어 팔았는데.. 양쪽이 다 틀렸다

전략은 단순했다. AI 확산의 수혜를 볼 반도체 등 하드웨어를 사고, 타격이 예상되는 소프트웨어 기업을 공매도하는 방식이었다. 매수 종목에는 SK하이닉스와 샌디스크, 블룸에너지, AI 클라우드 기업 네비우스 등이 담겼다.
문제는 시장이 정확히 반대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AI 인프라 투자 부담과 수익성 우려가 커지며 보유 종목은 급락했고, 공매도한 소프트웨어 주가는 오히려 올랐다. 양쪽에서 동시에 손실이 났다. 여기에 천문학적 차입이 얹혀 있었다. 자산 가치가 떨어지자 프라임 브로커들이 추가 증거금을 요구했고, 마진콜을 막기 위해 팔면 가격이 더 떨어지고 그래서 담보가 더 필요해지는 악순환에 갇혔다. 결국 골드만삭스, JP모건 등이 시장 충격을 줄이기 위해 매각을 지원했고 포트폴리오는 시타델로 넘어갔다.
청산이 끝나자 시장이 튀어 올랐다

이 사건이 ‘진범’으로 지목되는 근거는 그 직후의 반응이다. 강제 매도 물량이 소화되고 최대 매도자가 시장에서 사라지자, 짓눌려 있던 종목들이 일제히 되돌아섰다. 나스닥100이 반등했고, 31일 코스피는 17.91% 폭등하며 역대 최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는 17년 만의 상한가로 마감했다.
JP모건도 이날 리포트에서 한국 증시가 지난달 중순 이후 강도 높은 디레버리징을 겪었지만 대부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며, 레버리지 ETF 청산은 사실상 완료됐고 헤지펀드도 90%가량 차입 축소를 마쳤다고 진단했다.
기업 가치가 아니라 남의 빚이 문제였다

정리하면 이렇다. 사상 최대 실적을 낸 SK하이닉스가 폭락한 것도, 삼성전자가 20만 원대로 밀린 것도 기업 가치가 훼손돼서가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빚으로 쌓아 올린 포지션이 무너지며 쏟아낸 물량이 한국 개인투자자의 계좌를 때린 것이다.
물론 청산이 끝났다고 안심하기엔 이르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 발표와 내년 메모리 수요 전망 등 변수가 줄줄이 남아 있다. 다만 이번 사태가 남긴 교훈만은 오래된 것이다. 투자 자체가 이미 충분히 어려운 일인데, 굳이 빌린 돈으로 그 난이도를 더 올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