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의 삼성전자 자리에 한때 일본이 있었다. 1990년 세계 반도체 매출 순위 1~3위는 NEC·도시바·히타치, 모두 일본 기업이었다. 톱10 중 6곳이 일본 회사였고 세계 시장 점유율은 49%에 달했다. 그런데 지금 이 이름들은 반도체 시장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세계를 삼켰던 ‘반도체 왕국’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반도체는 미국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높은 수율과 10%가량 싼 가격을 앞세워 D램 시장을 파고들었고, 1987년에는 세계 D램 시장의 80%를 장악했다. 미국 언론이 일본의 저가 공세를 ‘제2의 진주만 공습’에 비유할 정도였다.
그 절정이 1990년이다. 하지만 이후 30년, 일본 반도체는 줄곧 내리막이었다. NEC와 히타치의 D램 사업을 합친 엘피다는 2012년 파산했고, 도시바는 2017년 반도체 부문을 매각했으며, 파나소닉은 2019년 아예 반도체 사업에서 철수했다. 2010년대 후반 일본의 세계 점유율은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다.
무엇이 왕국을 무너뜨렸나

일본 학계의 진단은 뼈아프다. 일본 사회를 분석해 온 도쿄대 교수는 저서에서 몰락 원인으로 근시안적 미래 예측을 꼽는다. 2000년대 대형 전자기업들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환에 수조원대 투자를 쏟아붓던 그 시기, 세상은 이미 ‘방송’에서 ‘인터넷’으로 넘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업 체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점도 지적된다. 설계와 생산을 나누는 수평 분업이 세계 표준이 되는 동안, 일본 기업들은 모든 공정을 끌어안는 종합전기 방식과 연공서열식 조직을 고집하다 어느 쪽도 아닌 상태가 됐다는 분석이다. 종합가전 회사 안에서 반도체는 ‘사활을 건 본업’이 아니라 여러 사업 중 하나에 불과했고, 목숨 걸고 달려드는 한국·미국 기업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만 반론도 있다. 1985년 플라자합의와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 등 미국의 통상 압박이 결정타였다는 ‘외압론’이다. 협정으로 손발이 묶인 사이 한국·대만이 치고 올라왔다는 시각으로, 일본 내부에서는 인력 유출을 원인으로 꼽는 목소리도 있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일본 반도체가 전멸한 것은 아니다. 소니는 이미지센서 세계 1위를 지키고 있고, 옛 도시바 메모리인 키옥시아는 낸드 시장 상위권에 남아 있다. 특히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일본은 여전히 세계 점유율 1위, 장비도 미국에 이은 2위다. 완제품 왕좌는 내줬지만 뿌리 산업은 쥐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는 정부가 반도체를 경제안보 전략물자로 지정하고 제조 부활에 대규모 지원을 쏟고 있다. 30년 만의 재도전이 통할지, 일본의 몰락사는 지금 정상에 있는 나라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