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공군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군산공항에서 약 1km 떨어진 호텔. 객실 책상에는 주파수를 잡아내는 신호수신기(SDR)와 고성능 안테나,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 60대 남성이 전투기 조종사와 관제탑 교신을 몰래 듣고 녹음한 장비다. 그런데 이 남성에게 적용된 혐의는 간첩죄가 아니다.
‘적국’이 아니면 간첩이 아니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지난 11일 이 남성을 일반이적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그는 2024년 이후 한미 연합훈련 시기에 맞춰 여러 차례 입국한 것으로 조사됐지만, 경찰에서는 항공기 교신을 듣는 게 취미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비슷한 시기 평택에서 주한미군 훈련 자료를 넘겨받은 또 다른 인민해방군 출신 중국인도 같은 혐의로 구속됐다.

간첩죄를 못 쓴 이유는 현행 형법이 ‘적국’, 즉 북한을 위한 행위만 간첩으로 보기 때문이다. 1993년 일본 후지TV 서울지국장이 한국군 장교에게 군사기밀을 받아 일본대사관 무관에게 넘겼을 때도 일본이 적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군사기밀보호법만 적용됐다. 사형·무기 또는 7년 이상 징역인 간첩죄에 비해 일반이적죄는 무기 또는 3년 이상 징역으로 형이 가볍다.
73년 만에 고쳤지만 남은 구멍

오는 9월 13일 시행되는 개정 형법은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를 위한 간첩행위도 처벌하도록 했다.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73년 만의 변화다. 그러나 군산 사건 피의자가 개정법 시행 뒤에 범행했더라도 간첩죄로 처벌될지는 미지수다. 수사기관이 ‘외국의 지령·사주’를 입증해야 하는데, 스파이 특성상 지령 문서가 남는 경우는 드물고 중간 전달책이나 암호화 통신을 거쳤다면 장기간 통신·계좌 추적 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2024년 국정원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넘어가면서 전문성이 떨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한 공안통 출신 전직 검사장은 지령을 밝히려면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며 수사 역량이 관건이라고 짚었다. 지령 입증 요건을 정황 수준으로 완화하자는 주장도 나오지만, 기준이 불명확해지면 자의적 적용과 외교 마찰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맞선다.
반도체 빼돌려도 무죄 60%

개정법은 보호 대상을 군사기밀에서 국가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국가기밀’로 넓혔다. 반도체 같은 핵심 산업기술 유출에도 간첩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 기술 유출에는 주로 산업기술보호법이 적용되는데,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2021년 이 법 위반 1심 사건 33건 중 60.6%가 무죄, 27.2%가 집행유예였고 실형은 2건에 그쳤다. 미국은 경제스파이법, 영국은 2023년 국가안보법으로 외국 세력과 연계된 기술 탈취를 안보 범죄로 다룬다.
다만 어떤 기술까지 국가기밀로 볼지는 판례로 정해질 전망이다. 법이 바뀌어도 수사 역량과 입증 기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간첩죄 없는 간첩’은 계속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