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미들의 탈출 정황이 숫자로 드러났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증시 대기자금인 투자자예탁금은 지난 22일 103조8765억 원까지 쪼그라들며 5개월여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지난달 4일 사상 최고였던 139조6948억 원에서 한 달 반 새 36조 원이 빠져나간 것으로, 이제 100조 원 선 사수가 위태로운 지경이다.
롤러코스터 국장에 질려 짐을 싼 그 돈은 어디로 갔을까.
한 달 새 4배.. 행선지는 미국이었다

한국예탁결제원 세이브로에 따르면 이달 1~23일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순매수액은 25억3026만 달러, 약 3조7000억 원에 달했다. 지난달(6억3296만 달러)의 4배 규모다.
흐름의 반전이 선명하다. 코스피 불장이던 4~5월 미국 주식을 내다 팔던 서학개미들은 국장이 고점을 찍은 지난달 순매수로 돌아섰고, 폭락장이 덮친 이달 매수 폭을 폭발적으로 키웠다.
굳이 해외 계좌를 트지 않은 개미들도 움직였다. 최근 일주일 국내 상장 ETF 자금 유입 상위 5개 중 3개가 미국 S&P500·나스닥100 추종 상품으로, ‘TIGER 미국S&P500’에만 2214억 원이 몰렸다.
그런데 산 게 하필.. 쇼핑 목록의 반전

행선지보다 흥미로운 건 장바구니다. 이달 순매수 1위는 미국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 하루 수익률을 3배로 추종하는 레버리지 ETF ‘속슬(SOXL)’로, 2조2000억 원어치가 담겼다. 2위는 지난 10일 나스닥에 상장한 SK하이닉스 ADR(약 9000억 원), 3위는 한국 증시를 3배로 추종하는 ‘코루(KORU)’였다.
국내 반도체 변동성에 데어 떠났다면서, 정작 산 것은 더 센 반도체 3배 레버리지와 하이닉스, 심지어 한국 증시 3배 상품인 셈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등락 폭이 커진 국내 시장 대신 미국 선호가 강해졌다면서도, 국장에서 입은 손실을 미국의 고위험 레버리지 상품으로 만회하려는 심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빚투는 줄고 하락 베팅은 늘고
국장을 향한 시선은 갈수록 싸늘하다. 빚투 지표인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23일 32조7492억 원으로 일주일 새 1.8% 줄어든 반면,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대차거래 잔고는 158조6047억 원으로 5.1% 불었다. 오를 것이라는 빚은 줄고 내릴 것이라는 베팅만 쌓이는 그림이다.
다만 ‘미장 갈아타기’가 안전한 피난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SOXL 같은 3배 레버리지는 등락이 반복되면 복리 효과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라, 국내 단일종목 레버리지에서 겪은 위험이 바다를 건넌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손절의 상처를 더 큰 배율로 메우려는 선택이 어떤 성적표로 돌아올지, 개미들의 두 번째 베팅이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