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2년 설립돼 나폴레옹 전쟁 자금을 댔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계좌까지 관리하던 영국 최고 명문 베어링스은행. 230년 넘게 이어진 이 은행은 1995년, 싱가포르 지점의 28세 트레이더 한 명 때문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네덜란드 ING에 단돈 1파운드, 우리 돈 2000원 남짓에 팔렸다.
그 직원의 이름은 닉 리슨이다.
비밀 계좌 ‘88888’에 숨긴 손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학벌 없이 입사한 리슨은 싱가포르에서 파생상품 거래로 큰 수익을 내며 본사의 스타로 떠올랐다. 문제는 그가 거래와 결제 업무를 동시에 맡아 스스로를 감시하는 구조였다는 점이다.
손실이 나기 시작하자 그는 ‘88888’이라는 오류 계좌에 손실을 숨기고, 이를 만회하려 더 큰 베팅을 거는 악순환에 빠졌다. 본사는 그가 보고하는 가짜 수익만 보고 오히려 거액의 자금을 계속 보내줬다.
고베 대지진, 도박의 끝

운명의 방아쇠는 1995년 1월 17일 고베 대지진이었다. 리슨은 일본 닛케이지수가 좁은 범위에서 움직인다는 데 거액을 걸어둔 상태였는데, 지진으로 증시가 폭락하며 손실이 폭발했다. 그는 지수가 반등한다는 데 다시 물타기 베팅을 키웠지만 시장은 반대로 갔다.
최종 손실은 약 8억6000만 파운드. 당시 환율로 14억 달러에 달해 은행 자기자본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리슨은 “죄송합니다(I’m sorry)”라는 메모를 남기고 도피했다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체포됐고, 싱가포르에서 6년 6개월 형을 살았다.
2000원짜리 매각이 남긴 교훈

233년 명문의 최후는 허무했다. ING는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베어링스를 1파운드에 인수했다. 여왕의 은행이 껌값에 넘어간 이 사건은 이후 전 세계 금융권이 트레이딩과 결제 업무를 분리하고 리스크 관리 체계를 뜯어고치는 계기가 됐다.
리슨의 수기는 ‘갬블’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은행 하나를 무너뜨린 것은 천재적 사기가 아니라, 견제받지 않는 한 사람과 그를 방치한 시스템이었다는 것. 30년이 지난 지금도 금융권 신입 교육에서 이 사건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